환자 사연을 이메일로 보내면, 치료비 대신 내줘...8년간 23명에 '익명의 기부'
지난 5월 24일 오후 서울 강동경희대병원에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모(19)군은 "얼마 전 병역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양쪽 무릎 연골판이 심하게 손상돼 빨리 수술을 받지 않으면 더 이상 걷지 못할 수 있다고 한다"며 울먹였다. 이군은 2년 전부터 지하 단칸방에서 어머니와 남동생과 함께 살고 있다. 이군의 어머니는 10년 전 이혼하고 두 아들을 혼자 키우다가 "동업을 하자" 는 지인에게 사기당해 집을 담보로 대출 받은 돈을 모두 날렸다. 이군이 대학 등록금으로 쓰기 위해 아르바이트로 모아뒀던 돈도 함께 날아갔다.
이군의 사연을 들은 한 직원이 "키다리 아저씨에게 이메일을 보내자" 고 제안했다. '키다리 아저씨'는 8년째 이 병원 환자들에게 치료비를 지원하는 익명의 후원자를 말한다. 이메일로만 연락을 주고 받을 뿐 누구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이 병원 직원들이 동화에 나오는 '키다리 아저씨'라고 부르는 것이다.
김린아 사회사업팀장이 이 후원자에게 "사정이 이러한데 도와주실 수 있으신지요?"라는 메일을 보냈다. 세 시간 뒤 "돈을 보냈습니다."라는 답장과 함께 병원 계좌에 치료비 350만원이 입금됐다. 며칠 후 병원 측이 "치료 발 받았다"고 알리자 다음 날 "참 다행입니다.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연락 주세요"라는 짧은 답장이 왔다.
키다리 아저씨의 기부는 지난 2008년 4월 시작됐다. 병원 사회사업팀에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수화기 너머로 중장년 남성의 음성이 들렸다. "큰 돈을 내기는 힘들지만 치료비가 없는 환자를 돕고 싶습니다. 메일 주소를 알려드릴 테니 지원이 필요한 환자가 있으면 사연을 보내주세요." 이 남성은 아들이 만들어 줬다는 이메일 주소를 부른 뒤 직원이 답도 하기 전에 전화를 끊었다.
이후 병원은 사정이 급한 환자가 있으면 키다리 아저씨에게 메일를 보냈고, 그 때마다 그는 군말 없이 치료비를 보내왔다. 대장암에 걸린 60대 독거노인, 기초수습가정에서 1.1kg 미숙아로 태어나 뇌병변 장애 판정을 받은 갓난아기까지 그간 23명이 이 익명의 기부자 덕에 치료를 받았다. 도움을 받은 환자들은 여러 차례 병원 측에 "키다리 아저씨의 연락처라도 알려달라"고 요청했지만 병원 측의 답은 항상 같다. "저희도 이분이 누군지 모릅니다. '좋은 분'이 도와줬다고만 말해달래요."
그동안 3000만원의 치료비를 기부해온 키다리 아저씨는 지난달 10일 병원에 1억원을 내놓으면서 이메일 한통을 보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아 이 돈을 보냅니다." 그는 신상이 드러날까봐 기부금 영수증도 발급받지 않았다고 한다. 지난 6월 개원 10주년을 맞은 강동경희대병원은 이 돈으로 '키다리 아저씨 기금'을 조성해 가정 형편이 어려운 환자들을 우선적으로 돕기로 했다. 조선일보는 병원 측에 부탁해 키다리 아저씨와 이메일을 주고 받았다. 그는 "몸이 아파 일을 못 하고, 일을 못 해 살림이 어려워지는 악순환에 빠진 분이 많은 것 같아 기부를 시작했다."고 했다. "'내가 이런 일하고 있습니다'라고 자랑하면 기부하는 의미가 어디 있나요. 도움을 받은 분들이 다른 분에게도 베풀어 주면 그걸로 됐습니다. "
출처 : 조선일보 이민석 기자